데카브리스트의 여인들
데카브리스트의 여인들
1) 예카테리나(Ekaterina Ivanovna Trubetskaya 1800-1854)
< 기념관에 걸려있는 트루베츠코이 공작 내외의 초상화>
예카테리나는 데카브리스트 부인 중에 가장 먼저 시베리아에 온 사람이다. 그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했다. 예카테리나 집안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녀의 집 도서실에는 장서만도 5천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트루베츠코이를 파리에서 처음 만나 1821년 결혼했다. 남편은 그녀보다 10살 위였다.
남편이 유형을 떠난 뒤 예카테리나는 곧바로 뒤따라갔다. 마리야 집안과 달리 예카테리나의 부모는 그녀의 시베리아행에 반대하지 않았다. 1826년 9월, 수 개월 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그곳에서도 훨씬 더 가야 하는 네르친스크의 광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르쿠츠크의 총독은 당국의 명령에 따라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5개월을 버텼다. 그 사이에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가 도착했던 것이다.
이들은 1827년 2월이 되어서야 네르친스크의 블라고닷스크 은광에서 중노동을 하는 남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처음 이곳에 도착해 수용소 벽 틈으로 족쇄를 찬 여위고 핼쑥하며 수염이 덥수룩한 채 해진 외투를 입고 있는 공작이었던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실신했다고 한다.
마리야는 족쇄를 찬 채 일하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남편의 족쇄에 입을 맞췄다.
두 부인은 블라고닷스크 은광 근처의 허름한 나무집을 사들여 남편들을 뒷바라지 했다. 얼마나 작고 형편없는 집이었는지, 훗날 예카테리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벽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면 발이 문에 닿았다. 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옹이 틈 얼어붙은 사이로 머리카락이 통나무에 얼어붙었다.”
<블라고닷스크 광산에 있는 뜨루베쯔카야와 발콘스카야 부인의 집>
광산촌에서의 첫 달은 그녀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간이었다.
궁궐 같은 곳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부인들은
뻬치카를 때고
물을 길어오고
옷을 빨고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기워 남편들에게 주고
모든 것을 직접 했다.
그녀들은 모든 따뜻한 것들을 유형자들에게 주었고
자신들은 해진 반장화를 신고 다니며 동상에 걸렸다
귀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한 부인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음식이며 빨래며, 뻬치카를 때는 일 등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남편들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데카브리스트 유형수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주민들에게도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해 칭송을 받았다.
1829년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는 결정이 내려졌다. 3년간 차고 있던 족쇄가 풀렸다. 그렇다고 강제노동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트루베츠코이는 가장 늦게 강제노동형이 풀려 그후에도 10년간 더 노역을 해야 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아이가 없던 두 사람 사이에 1830년, 9년 만에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 첫 딸 알렉산드라 이후 연달아 아이들을 낳았다.
트루베츠코이는 1839년 말 13년 만에 강제노동형을 마치고, 이르쿠츠크 인근의 부랴트 마을인 아요크로 이주한 후로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금광개발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곳에서도 항상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족과 친척들이 보내 온 약들을 집으로 찾아 온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카테리나를 “명철한 지혜와 선한 가슴이 훌륭하게 하나가 된 무한한 자비의 화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발콘스키 가족에게는 1845년 이르쿠츠크로의 이주 허가가 떨어졌지만,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1854년에 가서야 겨우 이 도시로의 이주허가가 떨어졌다. 허가가 떨어지자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이 도시에 셋집을 얻어 살면서 목조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인 예카테리나는 새 집이 완공되기 전인 1854년 10월 1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새집에 살아보지도 못했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사면을 받기 2년 전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동시베리아 총독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그녀는 앙가라 강변에 가까이 있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먼저 간 아이들과 함께 묻혔다.
이 수도원에 막 들어서면 처음 마주치는 것이 예카테리나가 묻혀 있는 철책이 둘러쳐있는 작은 무덤이다.
부인의 죽음을 애통해 했던 트루베츠코이는 이르쿠츠크를 떠나지 않으려했으나 3년 뒤인 1857년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면서 부인의 무덤에 들러 통곡을 했다고 한다
2)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Mariya Nikolnaevna Volkonskaya 1805~1863)
발콘스키의 부인인 마리야(1805~1863)는 19세 때인 1825년 1월, 18살이나 위인 37세의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과 결혼했다.
사건은 이해 12월 14일에 터졌고, 마리야는 얼마후인 1826년 1월 2일 첫 아들 니콜라이를 낳았다. 그리고 닷새 후인 1월 7일 남편과 남편의 형제, 삼촌 등이 잡혀갔다.
이후 재판에서 남편은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 거의 끝장난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마리야의 아버지 라옙스키 장군은 발콘스키로부터 이혼 동의를 받아왔다. 라옙스키 장군은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마리야는 당국과 가족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거부했다. 그녀는 1826년 12월 22일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났다. 돌도 안된 어린 아들을 집에 두고...( 아들은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쌍뜨 뻬제르부르그에서 시베리아로 가던 도중 그녀는 모스크바의 친척 지나이나 발콘스카야 집에 들렀고, 이곳에서 마리야를 위해 연 만찬 자리에 마리야 가족과 가깝게 지냈던 시인 푸쉬킨이 참석했다.
당시는 철도도 없던 때였다. 그녀는 수 개월간의 여행 끝에 마침내 동시베리아의 수도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푸쉬킨이 그린 마리야 라옙스카야(결혼 전 아버지의 성)>
(시베리아로 갈 때)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